영화/2002 복수는 나의 것

KINO 2002년 4월 호 (84호) - [Talk] 영화배우 신하균과 정재영의 만남

신류_0530 2022. 11. 2. 16:43

* 영화 <복수는 나의 것>, <피도 눈물도 없이> 관련 내용이 나옵니다.

* 잡지에 나오는 그대로이기에 맞춤법이 틀릴 수 있습니다.

* 문제 시 알려주세요.


[Talk] 영화배우 신하균과 정재영의 만남

 

신하균과 정재영이 만납니다. 이들이 영화가 소비되는 시스템 문제 속에서 우리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흥미로운 지점들을 보여주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같은 대학 동아리 선후배 사이이기도 한 이들은 지금은 수다라는 집단에서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같은 작품에 함께 출연하여 서로 다른 연기를 펼칠 때도 있었고, 서로 다른 작품에서 자신들만의 연기를 보여줄 때도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그들의 최근작 <복수는 나의 것><피도 눈물도 없이>는 각자에게 자신들 연기의 스펙트럼을 확장시킨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이전 연기의 틀을 깨버림으로써 새로운 틀을 짤 수 있었다는 신하균과, 전형성과 파격에 대한 고민 속에서 오히려 가장 자기답게 접근하는 것이 흥미로운 답이 되었다는 정재영. 이 두 배우가 지금까지의 연기 인생 중에서 유례없는 악전고투를 끝낸 지금,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바로 선택은 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말은 우리로 하여금 여전히 그들의 다음 영화를 숨죽이며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기막힌 | 사내들 | 따로 | | 같이

 

문화벤처 수다에 소속된 신하균과 정재영은 각각 사제지간의 감독들이 같은 해 차례로 만든 영화에 출연하였다. 선배 정재영은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투견장 막장 인생 독불을, 후배 신하균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에서 누나를 위해 유괴에 나섰다가 예정된 운명 앞에 주저앉고 마는 류를 연기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신하균이 만들어내는 말 못하는 청각장애인 류는 흥미롭다. 생략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 가는 영화 속에서 류는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 사이의 경계를 혼란시키고, 자기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어리석게도 더 큰 죄악으로 속죄한다. <킬러들의 수다><서프라이즈> 사이의 핏발 서린 신경증과도 같아 보이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 신하균은 지금껏 가장 오랜 시간 출연하였지만, 역설적으로 대사는 한 줄도 없었기에 전혀 새로운 도주선이 되었다. 그것은 그전까지 단 한 번의 액션연기 경험도 없었지만, 영화 속에서 당대 최고 무술감독과의 일대일 대결과 더불어, 그 속에 녹아드는 감정의 드라마를 동시에 소화해낸 정재영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두 사람의 캐릭터는 정반대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정재영이 악다구니처럼 살아남기 위해 쉴 새 떠들어대는 남자였다면, <복수는 나의 것>에서 신하균은 죽는 순간까지 단 한 마디 할 수 없었던 청각장애자였다(정재영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의 전처 남편으로 잠깐 출연하였지만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은 직접 마주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독불이나 <복수는 나의 것>의 류는 모두 세상과의 싸움에서 좌절하고 끝내 죽음으로 마감해야 했던, 그러니까 저주받은 운명의 짐을 지고서 고통스럽게 수난의 길을 걸었던 반() 영웅들이다. 그들은 공히 사회의 지배적인 규범으로 비껴나 아노미를 경험하는 인물들이며, 언제나 실존의 불안에 떠는 심리적 장애인들이다. 사제지간의 동료들이 각자의 시스템 속에서 최선을 경주하여 만들어낸 각각의 영화들, 그 속에서 각기 다른 역할로 매번 새롭게 태어나야 했던 선후배 배우들, 그 우정의 공동체 속에서 연기자들과 텍스트 그리고 각각의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는 어떤 화학 작용이 일어나는 것일까. 여기 신하균과 정재영이 각기 출연한 영화들을 종회무진 되짚으며 그 물음에 답한다.

 

 

<복수는 나의 것>을 보니까 처음에 시나리오를 봤을 때도 예상은 했었지만, 박찬욱 감독님이 시나리오 느낌 그대로 밀어 붙여 영화를 찍으신 것 같아. 나는 개인적으로 관객을 짓누르는 영화를 좋아해. 나는 그게 영상의 힘이라고 생각하든. 그래서 <블랙호크다운>도 굉장히 좋게 봤어. 나에겐 전투 장면이 어떤 울림 같은 것을 줬는데 대중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나 봐. 대중들은 편안하지 않은 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 같아. 나는 연기자니까 그게 궁금해. <복수는 나의 것>은 절제되어 있지만 원래 대사가 없는 거하고 절제하는 거는 다르잖아. 대사가 없다고 해서 다 절제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단 말야. 무엇보다도 처음에 어떻게 접근해갔는지 궁금해.

 

영화 찍기 전에 저희는 대사가 별로 없으니까 리딩이 없잖아요. 나머지 분들도 한 번 정도만 리딩을 했을 거에요. 전 청각장애자니까 아예 리딩이 없었고(웃음). 다 같이 MT를 가서 토론과정을 가졌어요. 그때 감독님이 영화의 성격과 톤을 이야기하면서 건조하고 절제된 연기를 요구하셨어요. 그런 기본적인 바탕 위에서 현장에 나가면 감독님과 큰 대화 없이 알아서 해나갔어요.

 

배우들이 느끼는 욕심이라고 할까? 이 정도만으로 표현이 덜 될 것 같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잖아. 나도 <피도 눈물도 없이> 하면서 느꼈던 거거든. 이번 영화를 하면서 주어진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 행동으로 더 해야겠다는 느낌을 받았던 적은 없었어?

 

저는 오히려 덜 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은 있어요. 전체를 다 절제하거나 너무 보여주지 않아도 탈이 되고, 너무 많이 보여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적재적소에서 그에 맞게 해야 하는데 그건 감독님이 정확히 잘 집어주셨어요. 가령 누나가 죽은 다음에 울부짖는 장면이 있잖아요. 저는 고개를 쳐들면서 크게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영화에서 필요한 연기가 그런 쪽은 아닐 거라고···. 제가 테스트할 때 했던 연기는, 털썩 주저앉으면서 그냥 흐느끼는 정도의 연기였어요. 누나의 몸에 얼굴을 가리고 등이나 몸의 흔들림, 혹은 호흡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게 이 영화에 맞는 연기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나도 절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있었나 봐요. 감독님이 보시더니 그거보다는 한 단계 높은 표현을 생각해보자고 하시더라구요. 고개를 들면서 해볼 수 있는 제스처가 없을까 하시면서요. 그렇게 해서 나온 장면이, 누나를 잡고 흐느끼다가 다시 얼굴을 보고 고개를 드는 거였어요. 얼굴은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가더라도 괜찮았어요. TV에 나오는 소리가 있으니까요. 그 장면에서는 그 정도까지 해주지 않았으면 누나에 대한 슬픔이 효과적으로 잘 표현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류는 사실 정말 누나를 위해서만 살아왔고 누나밖에 없었던 놈이란 말야. 관객들이 보기에도 이 슬픔의 표현은 굉장히 강렬한 건데 그렇다고 관객들에게 슬픔이나 눈물을 강요하지는 않아. 그 장면에서 관객들이 같이 울었으면 좋겠는데 울게 만드는 걸 거부하니까.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너무 야속한 거지. 일반적인 리얼리티를 가진 영화가 아니니까. 배우는 그게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아닌가 알고 싶었는데 오히려 반대네?

 

그렇죠. 감독님이 디테일하게 연기부분을 터치하지는 않으셔도 정확한 지점에서 정확하게 표현의 수위를 알려주시고 했기 때문에 다른 부분들에서 절제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영화를 보면서 내가 찍을 때 생각했던 느낌이 과연 맞았을까 틀렸을까 살피는 거 있잖아. 옛날에 강호 형에게도 <반칙왕> 끝냈을 때 그런 걸 물어봤었어. 그 영화가 코미디잖아. 대부분이 김지운 감독님과 강호 형 둘이서 함께 만든 것들이거든. 연기가 처음 생각했던 거랑 몇 퍼센트 정도 맞았어요? 하고 물어봤더니 70에서 80퍼센트 정도는 맞았다고 하더라구. 그러니까 찍을 당시에는 이건 정말 재밌다, 정말 웃긴다 했었는데 전혀 반응이 없거나 기대만큼 나오지 않은 부분도 20,30 퍼센트 정도 있었던 거지. 그리고 이건 찍을 때는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반응을 볼 때는 엄청나게 효과가 있는 것도 있고. 물론 <복수는 나의 것>이 코미디 영화는 아니지만, 본인이 생각했을 때 찍을 때 느낌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됐거나 영화를 보니까 훨씬 더 제대로 표현이 나왔다거나 하는 부분이 있어?

 

그건 관객들의 반응을 기준으로 삼느냐, 아니면 나 자신의 판단을 그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같아요. 계산적인 설정이나 생각했던 의도들이 좋은 영향을 미친 것도 있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들에서 색다른 느낌이 튀어나올 때도 있는 것 같아요.

 

<피도 눈물도 없이>의 경우에 나는 그런 부분이 있거든. 예를 들어 신구 선생님이 “이번에 수진이(전도연)는 프로젝트에서 빼”라고 할 때 내가 변명하는 장면 있지? 촬영할 당시에는 내가 굉장히 리얼하게 그 장면을 연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표현이 약간 어설퍼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 류 감독이나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 것 같다고 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어. 마지막에 “수진아, 내가 그렇게 싫으냐?” 하는 장면도 나중에 보니까 조명 때문에 눈이 안 사는 거야. 그게 수진을 보면서 하는 대사라 눈으로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거였는데 그게 잘 안 읽혀지더라고. 그런데 나중에는 차라리 눈이 정확히 안 보이는 게 오히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같은, 더 복잡한 느낌의 뉘앙스가 풍길 수 있는 생각이 들더라구. 류감독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독불이는 어떻게 보면 전형적일 수도 있는 인물이잖아. 그렇다면 과연 그런 정석에 맞춰가야 하는 걸까 생각하다가, 잔머리 굴리지 않고 정재영스럽게 하는 게 가장 옳은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었거든. 그런 점에서 류라는 캐릭터에 어떤 식으로 접근했는지 궁금해.

 

저는 인물에 접근할 때 우선 그 인물의 정서가 나의 실제 정서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를 생각해봐요. 류도 결국 그렇게 저의 경험이나 저의 어떤 부분들로부터 많은 것을 시작했죠. 인물과 나 사이에서의 조정작업이라고 할까요? 인물과 나 사이에서 정서적인 코드들을 맞출 수 있게 하는 그런 일치하는 부분들을 찾아내야만 내가 연기하는 인물의 에너지를 계속 유지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류는 청각장애자라는 특수성이 있지만 청각장애자라고 하더라도 모든 청각장애자들이 다 똑같은 행동을 하는 건 아닐 거예요. 평소에 기침을 콜록콜록하는 사람일 수도 있는 거고 또 다른 특성이 있을 수도 있고···. 청각장애자다, 가난한 사람이다, 하는 걸 떠나서 무엇보다도 병든 누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내가 연기자로서 처한 입장과 류의 상처받은 입장을 놓고 동일한 지점을 찾아가는 거죠. 그걸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부분은 감독님이나 강호 형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좋은 걸 찾아내려고 노력했구요.

 

내가 알고 있는 신하균이라는 사람은 굉장히 착한 사람이라구. 물론 류도 착한 사람이야. 그렇지만 내가 알고 있는 신하균은 자기가 당한 것을, 야구방망이로 그렇게 잔인하게 복수할 사람은 전혀 아니란 말야. 신하균의 마음 속 한 구석 어딘가에,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물론 그렇게까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그런 무자비한 폭력성이 있다고 생각해?

 

아 있죠. 충분히 이해를 해요. 영화에서는 극단적으로 표현이 됐잖아요. 강호 형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솔직히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남의 신장을 꺼내서 씹어먹고 야구방망이로 그렇게까지 하겠어요? 그렇지만 그런 폭력성이나 잔혹함이 나에게 아주 없는 부분은 아니에요. 내재는 되어 있기에 그걸 충분히 이해하는 거죠.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보여지는 폭력이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게 좀 극대화되어서 표현이 되었을 뿐이지 당위성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연기할 때 인물들의 사고와 행동을 논리적으로 풀어가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보다 보면 막힐 수도 있어요.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장면이 가지고 있는 감정적인 함의를 이해하는 것 같아요. 자기 아이를 죽였다고 저렇게 잔인하게 아킬레스건을 잘라 죽여버릴 수가 있어? 누나가 죽게 되었다고 그 원인이 된 사람을 그렇게 야구 방망이로 머리를 때려 죽일 수 있어?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연기를 하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저렇게 단순히 리얼리티의 기준으로 <복수는 나의 것>을 보면 안 될 것 같아요.

 

여태까지 해온 작품들 하고 이번 작품이 많이 다르다고 생각해? 구체적으로 <공동경비구역 JSA> 하고는 어때? 그 영화도 사실 연기자들의 연기나 전체적인 톤이 절제되어 있는 그런 영화잖아. 쓸 데 없는 말 안하고 군더더기 없고 아주 깨끗하고···.

 

그런 부분은 똑같은 것 같아요. 단지 기가 좀 더 많이 뺏겼다고 할까? 형도 연기를 하니까 알겠지만, 매 작품을 만날 때마다 그게 어떤 작품이든 항상 어렵잖아요. 형도 쉽게쉽게 하지는 않잖아요. 그런 맥락에서는 일단 다른 영화나 이번 영화나 다를 것 없이 똑같은 고민을 한 것 같아요. 그렇지만 류라는 인물이 너무나 새로운 시도여서, 그전의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거고 해서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영화를 보면 굉장히 절제되어 있는데, 이 영화는 그 절제와는 또 많이 다른 것 같아. 내가 보면서도 기를 많이 뺏겼다고 해야 하나? 술렁술렁하는 절제가 아니라 그런 어떤 함축된 연기를 하는 것 같았어. 이거 내가 너무 띄워주는 거 아냐(일동 웃음).

 

하하, 제가 좀 말주변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 형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주고 있는 거예요. 제가 평소에 말을 두서없이 하고 지금도 그렇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분명히 이해하고요. 그런데 그게 정리가 안 될 때가 있어요. 하여간 그런 게 잘 안되는 사람이에요(웃음). 연기가 좋은 건 제가 이해하고 있는 거나 말을 하고 싶은 것들을 저의 다른 부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표현할 수 있다는 거죠. 영화도 그렇고 연극도 그렇고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여러 측면들을 시나리오 작가님, 촬영감독님, 감독님 등등이 함께 정서를 모아서 표현해내는 거잖아요. 말을 못하는 대신 영화나 연극에서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또 주변 연기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 같아 좋아요.

 

연기자에겐 그게 가장 큰 카타르시스인 것 같아. 사실 내가 싸움을 하던 애도 아닌데 어디서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처럼 그렇게 싸워보겠어(웃음). 그것도 정두홍 무술감독이랑 단 둘이 말이야. 엄청 두들겨 맞을 때의 느낌도 평상시에는 느껴볼 수 없는 것인데, 그런 느낌을 가져본 다는 것에 굉장한 희열을 느끼게 되거든.

 

저 역시 류가 당한 심정적인 상태와 똑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지는 않죠. 제가 오래 산 것도 아니고 많은 경험을 한 것도 아니지만 나름대로 아팠던 적이 있고 슬펐던 적이 있어요. 그런 상황이 있었을 때 어느 누구와 얘기를 하면서 그 슬픔을 달랬던 기억들, 혹은 얘기를 나누지 못하고 품고 있었던 기억들, 그런 기억들이 다 담겨져 있는 것 같아요.

 

촬영하면서 본인이 가장 통쾌했던 뿐이 어디라고 생각해? 내 개인적으론 장기 매매단에게 야구방망이로 무자비하게 복수하는 장면을 찍을 때 신하균도 후련한 느낌이 들었을 것 같아. 왜냐하면 평상시의 신하균은 한번도 누구를 때리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니까. 연기하면서는 몰입이 되어서 못 느낄 수도 있겠지만, 특히 남자배우들은 그럴 때 굉장히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아. 평상시에는 해볼 수가 없는 것이고 영화 속에서 통쾌한 부분인 것도 사실이잖아. 물론 그 행동을 하면서 류로서 느끼게 되는 슬픔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나마 그 영화에서 신하균으로서 통쾌한 부분을 찾으라면 그 부분이 아닐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그렇죠. 그날이 어떤 날이었냐 하면, 새벽 6시부터 한바퀴를 돌고 24시간 촬영을 넘어선 순간이었어요. 지칠 대로 지쳐있었죠. 그 장면이 피도 나와야 되고 여러 가지 특수한 장치들도 필요하고 해서 촬영시간이 좀 오래 걸렸어요. 연기적인 맥락에서는 그게 복수심에서 나오는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힘들어, 힘들어하던 중에 아이씨, 왜 이렇게 촬영이 안 끝나(웃음)’ 하는 기분으로 내려치는 것도 있었어요.

 

하하, 나도 <피도 눈물도 없이>의 마지막 물류창고 신에서 “놔, 가방 놔, 못 놔? 놔!” 하면서 여자들을 때리는 장면이 있는데, 촬영을 열악한 상황에서 하다보니까, 물론 독불이 감정도 독불이 감정이지만 나로서는 화풀이야 화풀이(웃음), 상대방에게 화풀이를 하는 거야. 그런 게 사실 안 섞일 수가 없거든, 환경이 오히려 연기에 플러스가 되는 경우지.

 

그런 식으로 환경이 연기를 오히려 더 좋게 만든 부분이 있다면, 물 속에서 죽는 장면이었어요. 그게 사실 원래는 겨울에 찍을 수 있는 장면이 아니죠. 그런데 스케줄이 밀리다보니까 겨울에 찍게 되었는데 물론 연기에 관한 생각도 있었지만 그 추위가 연기를 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케이스였어요. 죽기 전에 두려워서 떠는 게 아니라 연기가 아니라 진짜 추워서 떨고 있는 거거든요(웃음).

 

추위를 애써 감추려고 했다면 오히려 그런 감정이 안 나왔을 것 같아. 마지막에 네가 강호 형이 대사를 다 한 다음 손을 뻗잖아. 내가 느끼기에는 자신은 죽는데 그 상황에서 강호형을 생각해주는 느낌이었어. 그렇게 한 거야?

 

그렇죠.

 

그래서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 원래 시나리오에도 그런 게 있었나?

 

원래도 그런 게 있어요. 그런데 저는 찍기 전에는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사람이 죽는 마당에 정말 리얼리티로 간다면, 쟤가 왜 날 죽이려고 하는지, 물론 내가 잘못을 했더라도, 그걸 뉘우치기보다는 상대편을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살 생각을 할 것 같아요. 그래서 그 표현에서 상대방을 위하려는 듯한 느낌이 너무 과하게 가는 것도 오버일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표현이 보일 듯 안 보일 듯 하는 거기까지가 딱 좋았던 것 같아. 나는 그게 류의 캐릭터인 것 같아. 그만큼 류는 무슨 많은 생각을 가지고 복수를 한 것도 아냐. 그 장면에서 류의 행동이 그냥 약간 덜 떨어진, 순박한 느낌의 류로 인상이 오도록 하더라구. 그런 느낌 때문에 그 장면은 아주 인상깊었어.

 

강호 형한테 저 맞는 장면 보셨어요(웃음)?

 

니가 그렇게 맞고 있을 때 나는 투견장에서 정두홍 무술감독님하고 싸우고 있었어(웃음). 그때 니 얼굴이 퉁퉁 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그게 한두 테이크로 끝난 게 아니라 거의 열 테이크 정도 갔거든요. 일반적으로는 때리고 하는 건 순간이잖아요. 아프더라도 시간은 금방 간다구요. 그런데 이번의 경우는 강호 형이 감전장갑을 끼고 데려와서는 눕혀놓고 한참 동안 생각을 하잖아요. 맞기 전까지는 그걸 기다리는 시간, 그 시간을 견디는 게 엄청 공포스러웠어요. 강호 형이 재미있는 게 매 테이크마다 타이밍도 그렇고 때리는 부위도 다 틀리게 해요. 그러니까 언제 날라올지, 어디서부터 어떻게게 때릴지 모르는 거야(웃음). 눈은 감고 있어야 되는데 가슴은 뛰면서 움찔하는 거예요. 강호 형이 나중에 엄청나게 미안해했어요.

 

배우들은 한 작품 한 작품 하면서 얻는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잖아. 이번에 <복수는 나의 것>을 하고 나서 특별하게 얻었다거나, 이건 내가 평상시에 생각하지 않았던 건데 연기적인 측면에서 특별히 확신을 갖게 되거나 한 점이 있어?

 

항상 그랬지만 이번에도 영화적으로 많은 공부가 됐고, 새로운 모험을 해봤다는 점에서 결코 후회되거나 하는 건 없어요. 이후에도 다른 새로운 것에 대한 모험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요. 연기라는 게 한 작품이 끝나면 왠지 무언가 알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잖아요. 지금 뭔가 조금 안 것 같아서 자신감이 생기는데 또 다음 작품을 하다보면 이전 작품에서 느꼈던 그런 게 아닌 것 같은 때가 많을 것 같아요. 새로운 걸 접했을 때 오는 부담감이나 풀어나가야 되는 숙제들이 항상 놓여져 있는 것 같아요.

 

류라는 사람이 신하균에게 엄청나게 애착이 가는 인물이잖아. 스스로 류를 바라봤을 때 가장 안타까웠던 장면이 어떤 거야?

 

영미 집 앞에 가방을 놓고 서 있는 장면이에요. 영미가 모자를 슬쩍 들어보는 그 장면이죠. 일이 자기 뜻과 무관하게 꼬여 가지고 누나도 죽고 누나도 묻다가 보니 애까지 죽었고···.

 

사실 관객들이 봤을 때는 가장 격정적일 때의 감정이 기억에 남지만, 연기자로서는 그런 감정의 분수령이 있어. 가령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독불이의 경우는 KGB의 집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때가 가장 비참해. 사실 그때 독불이는 그냥 말을 듣고 있는 것 뿐이잖아. 아무런 연기도 필요없고, 그런데 모든 사실을 KGB로부터 듣고 있을 때가 독불이로서는 가장 비참하고 안타까운 순간이야. 연기적으로는 아무 것도 표현이 되지 않는 순간이지만.

 

우린 영화는 많은 부분이 생략되고 점프가 되잖아요. 어느 정도 듬성듬성 여운들이 있다구요. 아이가 죽고 난 뒤 류가 어디 가서 뭘 하다가 왔는지 모르잖아요. 어쨌든 어딘가를 헤매다가 결국 여자친구의 집에 온 거겠죠. 그때의 연기가 딱히 대단한 것도 없고 덤덤하게 가만히 서 있었지만 연기자로서는 그렇게 오게 되었을 때의 비참함의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사실 그건 네가 아무런 감정이 없이 서 있더라도 사람들은 눈치 못 챌 수도 있는 거잖아.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 다른 장면들도 감독이 시키는 대로밖에 할 수 없는 거지. 자기가 본능적으로 감정의 흐름을 가지고 가지 못하고 영화 전반적으로도 캐릭터가 바뀌거나 들쑥날쑥하거나 일관성이 없어져버리지.

 

시나리오를 처음 볼 때부터 자기 캐릭터의 감정라인을 정확하게 파악해야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장면이라면, 자기가 이 영화의 가장 센 장면이라든가 자기가 가장 임팩트가 오는 장면에 힘을 주게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좋은 배우는 영화 속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그 포인트를 알아야, 전체적인 흐름을 꾀면서 연기를 풀어갈 수 있으니까.

 

그렇지. 전체적인 시나리오 상 특정 부분이 굉장히 임팩트가 강하고, 내 캐릭터가 강하게 각인되는 부분이라 하더라도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왔느냐에 따라서 달라져 버려. 따라서 어떤 부분은 과잉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부분은 모자랄 수도 있지. 그렇게 돼버리면 관객들이 공감을 못하거든. 왜냐하면 감정이 차곡히 쌓아지지 않았기 때문이지. 연기하려면 머리가 좋아야 한다는 게 바로 그런 것 때문인 것 같아. 그런 게 아니라면 감수성만 좋으면 되거든. 논리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어. 그렇지만 사실은 그런 부분들 때문에 해결이 안 돼. 강호 형 같은 경우 우리가 연기자로서 굉장히 인정하는 측면이 바로 그런 거지. 시나리오나 영화를 감독 이상으로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 그게 연기자로서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 그럼 이번에는 전체적인 질문을 해볼게.

 

너무 질문만 하려고 그러지 마세요(웃음).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다보면 나오고 그런 거죠.

 

나 오늘 키노 일일기자야, 왜그래(웃음). 계속 나만 이야기하는 것 같으니까 그렇지.

 

아니에요. 저도 오늘 정말 이야기 많이 하는 편이에요.

 

아무튼 지금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잖아. 스스로 좋은 연기자가 될 수 있겠다 하는 가능성을 언제 발견했는지 묻고 싶어. 나는 사실 PD가 되려고 입학했다가 우연치 않게 연극을 했었는데, 그러다가 상도 받고 하면서 내가 연기자로서 자질이 있나보다 하는 생각을 했거든. 남들이 인정을 해주는 것 같으니까. 그래서 시작하게 됐다가 학교에서 선배들에게 핀잔먹고 교수님들한테 혼나고 그럴 때는, 나 연극은 안 되나보다 하는 생각도 하고.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도 해오면서 지금까지 왔단 말야. 그런 걸 이야기하는 거야.

 

연기를 시작한 것도 막연한 생각이었고 구체적인 동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중고등학교 때 연극반에서 활동한 적도 없고 연기는 대학에 와서 처음 했어요. 저에게 가장 큰 자신감을 심어주신 분은 장진 감독님이죠.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이기도 하고요. 학교 연극 동아리에서 제가 딱 한 작품을 하고 군대를 갔어요. 제가 뭐 별로 해본 적도 없고 연기도 그냥 재미있게 했었기 때문에, 제대한 후에는 내가 뭐 어떻게 해야하나 하면서 걱정했죠. 그런데 휴가 나오거나 할 때 진이 형이 많은 용기를 주셨어요. 그게 그냥 용기를 주려고 했던 얘기인지, 아니면 나의 어떤 면을 보고 한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주는 이야기들이 제가 계속 연기를 할 수 있게 하는 큰 힘이 됐어요.

 

진이 형이 사람을 참 잘 알아봐. 우리가 우리끼리 칭찬을 잘 하거든(웃음). 장진 감독님은 사실 우리끼리만 있으면 매일 혼내면서 다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손가락을 치켜 세우면서 “신하균, 이야! 정재영, 이야! 3년만 있어봐, 정말 크게 돼 있을거야.” 그렇게 낯뜨겁게 칭찬 많이 하지(웃음).

 

연기를 하는 데 있어서 자신감이라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그게 어떤 경로로 생기든지 간에, 생기게 됐다면 연기를 위한 토대가 마련된 거라 봐요. 아주 단순한 생각일지 모르죠. 그래서 쉽게 잊는 지도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도가 지나쳐서 이상하게 가면 안 되겠지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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